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 개혁 (문단 편집) === 가톨릭 개혁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들 ===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로 분열시기는 마감하였지만, [[교황청]]은 잃었던 세속 권력을 회복하고 [[교황령]]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세속적 영토 다툼에 빠져들게 된다. 그리고 [[주교]]나 [[대주교]]는 대체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독점했고, [[추기경]]들은 대체로 [[이탈리아]] 명문가에서 선발되었고 [[교황]] 선출도 그리했는데, 오랜 세월 동안 교회 체계가 경직되면서 교회 조직이 관료화되자 경직성이 더해져 갔다.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 크게 3가지 흐름인데, 첫번째는 [[신비주의]] 운동이라고 볼수 있다. 중세 3대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[[마이스터 에크하르트]], 클레르보의 성 [[베르나르도]], 요한 타울러 등은 영성을 갖춘 신비주의자들로, 이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직접적으로 비난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혁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. 2번째는 데보티오 모데르나라 불리는 일종의 신자 경건운동으로[* 現 [[네덜란드]] 즈볼러(Zwolle) 근처에 위치한 빈데스헤임(Windesheim)을 거점으로 하여 [[토마스 아 켐피스]]에 의해 주도되었으며, 이 과정에서 '''[[준주성범]](De imitatione Christi, 그리스도를 본받아)'''이라는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. 수도원이 있던 자리는 종교개혁 이후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었으나, 일부는 남아서 [[https://commons.wikimedia.org/wiki/Category:Nederlands_Hervormde_Kerk,_Windesheim|네덜란드 개혁교회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]].] 수도원적인 경건을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렸다. 이는 [[마르틴 루터]]에게도 영향을 미쳤다. 3번째는 [[존 위클리프]], [[얀 후스]], [[사보나롤라]], [[발도파]]와 [[에라스뮈스]] 등의 사상적·윤리적 개혁가, 개혁 공동체들이었다.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과감하게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다. [[사보나롤라]]의 경우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면서 [[메디치 가문]]을 처바르고 피렌체의 개혁을 이끌다가 화형당한 바 있다. [[발도파]]는 청빈을 강조하여 당시 비대해진 가톨릭 교회의 사치와 부의 축적을 비판했다. 다만 이들이 번역이 금지되었던 [[라틴어]] [[성경]]을 번역했다는 오해가 있는데, 번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은 그 이전에도 행해지던 일이며 금지된 것도 아니다. 단지 [[인쇄술]]의 발달로 후대에 갈수록 번역이 활발해진 것뿐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